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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요재공>성유(成裕)配 정부인전주이씨행록(貞夫人全州李氏行錄)
(요재공후)22世성유(成裕)配 정부인전주이씨행록(貞夫人全州李氏行錄) 祖妣貞夫人李氏全州人世臣之女 孝寧大君諱補之后裔也 純祖二十五年乙酉五月十三日生而天資粹敏閨範純備威儀閒雅性行端莊及歸吾祖考 贈兵曹參判府君婦德媲美善事舅姑敬對君子式爲隣里婦人之模楷也舅嬰重疾百藥無效醫云花蛇爲當劑故大冬雪裏參判府君號泣山野一處氷雪先消有蛇光彩捕獲忙歸夫人置於床上祝夫拜謝訖至心亂煎先嘗而獻飲畢數頃以得神效此非至誠所悟窩天所感耶 哲宗六年甲寅府君病谹裂指灌口剌股煎湯以延十數日之命卒至永逝子女俱幼門戶冷落夫人乃不知至痛之在身切念府君裕后之託敎養三幼循循有法未嘗假辭色而至嚴且毒至于十餘歲訓女以織紝組紃敎男出就外傳各授其職責其成功而或見人之徒愛其子而不知敎督者則輒非之日徒愛反害於愛之之實言必稱舅姑而爲法焉每當府君諱日則前期六七日沐浴齊戒灑掃室堂使一塵不動曰夫祭也者盡誠敬精潔而己饌品豊畧隨家勢之有無不可考也終夜不就寝痛哭無異初終而哀動傍人人時夫人歲三十也癸亥冬十一月嫁長女于草溪鄭都事學聖而戒之日敬之勉之夙夜無違宮事 聖上五年戊辰冬子加禮將成媒約有勸富婚者夫人嚴辭拒之曰盖婚者地醜德齊可也如吾則早喪君子子無所學家勢赤立貧富懸殊不敢當也擇其合當處而是歲至月之晦行媳舅姑禮夫人見媳婉娩之容慈惠之德歎曰此賢婦矣自入門奉姑俱備志物以忠養或姑有疾病晨夜湥憂舍置他事或煑藥或煎粥或魚肉竭誠供具未甞見勉強勞苦之樣疾止復初事君子承以柔正克有䂓箴之風而兒輩雖有不安景色姑在未甞叱咜渾家晏然越三年辛未十二月嫁次女于海州崔監察東贊戒之亦如右是歲二月十七日擧一孫即都正完成也夫人甚愛之奇之或辟咡或抱背而戲之對人輙曰吾近二十年寡居悲痛之懷庶半解於今日否時夫人歲四十七癸酉七月日見孫女亦愛而戒之日女有三從之道汝知之乎知此道理而適人之家孝事舅姑敬對君子可矣後適康津金煥豊果遵夫人訓克成婦道焉自甲戌至丙丁年多荐餓所農不過一二石糜未者以一石許納于公税所餘者不足一年計粮時四然或有窮餓至死者輒恤之而猶存羸以備不虞及吉凶之費稱家之有無皆有品節而莫不均一至於衣服飲食甚薄自奉然猶悦於施人所難而夫人獨能之戊寅七月二十二日擧二孫即不肖也其慈育愛護之情不可一喙容矣庚辰 月二十四日擧三孫一日抱孫誠子曰汝既有三子則知其爲人父之道乎人之言云生子非難養爲難第善圖之快成人父之道如何時夫人歲五十六乙酉七月九日擧四孫愛之如右是年春吿子媳曰人生世間富貴成敗都在於善與惡也吾嘗見之積善之家福雖未至禍自滅未爲十年家勢稍饒子孫漸茁此是陰騭之明驗也爲惡之家則禍雖無電到渠之月下家道崩頹子孫多天此非陰罰之至酷耶吾之生前見如此者數人可不懼哉若等勿以惡小爲之善小不爲以至此境焉峙夫人歲六十一夫人之從孫完柱年僅五六喪其父母而雖有諸伯仲叔父不勝勢艱未嘗顧護故夫人提來愛育之無異嫡孫至二十甲申順成旭禮析產給之人皆稱之日有諸叔父而從祖母養而成就又至於析產此今世罕見之事也云爾丙戌秋將議長孫親事又有勸富婚者夫人拒之如右而吿子曰婦者家之所由盛衰也當善察爲婦者之性行及家法何如勿苟慕富貴人賢則富貴在其中也吾將成汝曹男婚女嫁三四人未嘗以財爲禮而各擇德焉越明年丁亥夫人之族孫一人居喪誕恣食酒肉夫人嚴辭戒之日居喪荒誕古有所戒而非徒古之所誡爲人子者哀痛極追欲死未能之豈可欲恣酒肉乎其人便自悔過戊子大饑十月日前者不知二人來到門外夫人命僮問其何許人則皆不勝飢寒者也二人伏乞惠借租幾許以濟八死之命則來秋備報之意極恳夫人命僕如其言而出給曰如此問急之物豈望㪅報以是資一時之困窮焉二人辭日善心如此厚重吾若不報則皆爲背恩恩德之漢也豈作無道之事致賀萬萬而去後四年秋何如二人來訪門外夫人命僮問其誰二人日某年間被恤之人也多饋酒饌來謝日夫人任德澤免彼戊饑之鬼錄貸去租一一具利而報却利受本庚寅五月六日又見孫女壬辰五月四日見五孫孫笄男女至六七人慈愛之情未嘗少弛而皆如一日吾之愛汝曹如此至甚感慕汝之先世與祖宏而然也時夫人歲六十九茂矣夫人之德於奴僕亦得其歡心而盡撫育之恩故至是歲冬家婢一女年將當婚夫人燒券送之而命曰無違室家之宜也婢女放聲哭之云小女不事上典將安之而保身乎生亦生於門下死亦如此不去爲矢夫人累累曉理而送隣閈常漢輩皆息服稱其至德日盛哉某夫人之德澤必受遐福云爾平日愛惡不曾隨人之顔面苟且必察而得其情對人不肯言他婦之短處而或見多言之婦則戒之日多言優是害己德云母子數人相依夙夜勤苦寔有感應之理故自天降穰脕年家道漸成滿庭諸孫亦皆文士名焉宜乎士林成載奎擧府君之孝行及夫人卓異之烈于方伯方伯轉以上聞 聖上下其事於該曹該曹覆啓請 贈以官階而旌之因 命如章壬辰並施 旌閭斯皆爲報之道出歟嗚呼哀哉翌年癸巳六月五日卒享年七十盖距寡居四十年而内外裔孫服麻者二十餘鄉黨宗族皆慽歎然之曰夫人之令德令儀有古士女之遺風而實爲女中之男傑也將期百歲之壽矣悲夫溪止七耋以其年八月十二日葬于淳昌茂林面芳花村上玉女峯聖智洞寅坐原嘗訓孫輩曰人之所以爲人只在於學也父勉師敎年強力富時學而無誠以鄉吏無知之眼見之則皆有耳目手足孰不曰人乎以聖賢之言思之則眞所謂牛馬而衿裾雖日有人之形其實何異乎禽獸也若等勉旃勿負汝祖母之言吾雖無似之女質嘗謂舅姑人之貴賤榮辱在於學與不學玆故今以之而戒爾立身非我言耄實若之先世訓也勿泛勿泛而先以孝於汝之父母次以敦於汝之兄弟弟或有不恭其兄兄勿效其不恭而當盡兄之友之之道兄或不友其弟弟勿學其不友而當盡弟之恭之之道則一家敦厚諸族和睦疎者猶親親者加密如此而不爲善人未之有也若等其不信吾言乎嗚呼聽用我謨者誰歟裒如充耳者誰歟勿墜先德而早無至於後悔之地至可至可夫人之其平常言語動作皆此等類也孰謂婦人之뷑行而忽言哉若使夫人爲男子而學文也其所成就殆亦秀出無積累君子者則末能梯及也矣不肖孫完輝在幼及聲色尚不恩乎聰明一如昨日之事感慕之交摯恐懿德之蕪泯欲傳于來裔謹撮平日要采鄉里之所傳濡筆臨紙節節飲血字字含淚謹記其生卒行治之大槩以竢百世君子子知德立言者攷焉 戊戌至 月 日 不肖孫 完燁 謹撰 (요재공후)22世성유(成裕)配 정부인전주이씨행록(貞夫人全州李氏行錄) 할머니 정부인(貞夫人) 이 씨(李氏)는 전주인(全州人) 세신(世臣)의 따님으로 효령대군(孝寧大君) 휘 보(補)의 후손이시다. 순조(純祖) 二十五년 을유(一八二五) 五월 十三 일에 출생하셨는데 천성이 영민하고 규범(閨範)을 두루 갖추시고 모습이 한아(閑雅)하고 행동이 단정하셨다. 우리 할아버지 증병조참판(贈兵曹參判)에게 시집오셔서는 아름다운 부덕(婦德)을 발휘하여 시부모님을 잘 섬기고 남편을 존경하여 이웃 부인들의 모범이 되셨다. 시아버지가 중병이 들어 백약이 효험이 없었는데 의원이 화사(花蛇)가 약이라는 말을 하자 한겨울 눈 속을 할아버지께서 울면서 헤매자 한 산골짜기에 얼음과 눈이 녹아 있고 뱀 한 마리가 빛을 내고 있어 맨손으로 잡아 가지고 돌아오셨다. 그걸 부인이 상 위에다 올려놓고는 하늘에 빌기를 마치고 심란한 마음으로 달여서 먼저 맛을 본 후 올렸다. 그걸 마신 지 조금 후 바로 신효(神效)를 보았으니 이는 지성이 하늘을 감동시켜 그런 것이 아니겠는가? 철종(哲宗) 六년 갑인에 할아버지의 병이 위독해지자 손가락을 잘라 피를 흘려 넣고 허벅지 살을 베어 달여 드려 수십 일 동안 연명하고 돌아가시게 하였다. 이때 자녀가 모두 어린데다가 집안이 가난하였다. 부인은 지극한 슬픔을 잊고 오직 남편이 부탁한 세 어린 자녀를 기르는데 온 정성을 쏟았다. 자녀 교육에는 법도가 있어 한 번도 얼굴빛을 꾸미지 않고 엄하고 독할 정도로 하셨다. 딸이 十여 세가 되자 길쌈과 바느질을 가르치고 아들은 밖의 스승에 나아가 공부하게 하여 각기 그 직분을 다하도록 하여 성공시켰다. 혹 남이 한갓 자식을 사랑할 줄만 알고 가르칠 줄을 모르는 것을 보면 그르게 여겨 말하기를 「사랑할 줄만 아는 것은 도리어 사랑을 해치는 것이다.」라고 하셨다. 말끝마다 시부모님을 일컬으며 본으로 삼았으며 매양 남편의 기일을 당하면 六, 七일 전부터 목욕재계하고 집안을 청소하여 먼지 하나도 날아다니지 않도록 하면서 말씀하시기를 「무릇 제사란 정성을 다하여 정결하게 하면 되지 제수는 집안 형편에 따라 하면 된다.」라고 하셨다. 밤새도록 잠을 자지 않고 통곡하기를 초상이 났을 때와 다르지 않게 하여 옆 사람까지도 애통하게 하였으니 이때 부인의 나이 三十세였다. 계해년 겨울에 장녀를 도사(都事) 초계(草溪) 정학성(鄭學聖)에게 출가시키면서 경계하기를 「남편을 존경하고 힘써 섬길 것이며 집안일을 어기는 일이 없어야 한다.」라고 하셨다. 성상 五년 무진년 겨울에 아들을 장가보내게 되었는데 매파(媒婆)가 부잣집과 혼인하기를 권하니 부인은 엄히 거절하며 이르시기를 「집안은 보잘 것 없어도 덕망이 서로 비슷하면 된다. 우리는 일찍 남편을 잃고 배운 바도 없으며 가정 형편 역시 가난하다. 빈부가 아주 차이가 나면 안 되니 합당한 곳을 가려 달라.」 하였다. 이해 동짓달 그믐에 구고례(舅姑禮)를 하였는데 부인이 며느리의 예쁜 모습과 어진 모습을 보고는 말씀하시기를 「어진 며느리가 되겠다.」라고 하였다. 그 며느리가 집안에 들어와서 정성껏 뜻을 받들고 음식을 봉양하는 것으로 시어머니를 모시었다. 혹 시어머니가 병환이 나면 밤낮으로 깊이 근심하여 다른 일을 그만두고 약을 달이고 죽을 끓여 고기반찬을 장만하는 등 정성을 다하였는데 한 번도 억지로 하는 듯한 모습을 보이지 않았으며 병이 곧 낫게 되었다. 남편을 유순한 얼굴로 받들고 법도가 있어 아이들이 혹 편치 못한 기색이 있더라도 시어머니가 계시기 때문에 꾸짖는 일이 없어 온 집안이 항상 조용하였다. 三년 후인 신미년 十二월에 차녀를 감찰(監察) 해주(海州) 최동찬(崔東燦)에게 출가 시키면서 역시 경계하는 말씀을 하셨으며 이해 二월 十七일에 손자 하나를 보았으니 바로 도정(都正) 완성(完珹)이다. 부인은 손자를 애지중지하여 앉거나 엎고는 희롱하셨으며 남을 보면 「내가 二十년 가까이 혼자 살면서 슬퍼하던 마음이 이 손자 때문에 오늘날 절반은 풀어졌다.」 하셨는데 이때가 부인의 나이 四十七세이셨다. 계유년 七월에는 손녀를 보았는데 역시 사랑하면서 경계하기를 「여자에게는 삼종(三從)의 법이 있으니 너는 아느냐? 이런 도리를 알아야 남의 집에 시집을 가서 시부모를 섬기고 남편을 공경할 수 있는 것이다.」 하셨는데 그 손녀는 과연 후일 강진(康津) 김환풍(金煥風)에게 출가하여 부인의 가르침을 지켜 부도(婦道)를 행하고 있다. 갑술년부터 병자 정축년 사이에는 흉년이 많이 들어 농사지은 소출이 한두 섬에 불과하였다. 한 섬을 세금으로 바치고 나면 남은 것이 네 식구의 일 년 양식이 되지 못하였는데 그래도 혹 굶어서 죽게 된 사람이 있으면 문득 도와주고 남은 것은 뜻밖의 일에 대비하셨다. 길흉사에 드는 비용은 집안 형편에 따라 하여 절약하되 고르지 않게 함이 없었으며 자신의 음식과 의복은 매우 검소하게 하면서도 남에게 베풀기를 좋아하여 남들은 하기 어려운 일을 부인은 잘하셨다. 무인년 七월 二十一일에 둘째 손자를 보셨으니 바로 불초 저인데 사랑하며 인자하게 길러 주신 정은 몇 마디 말로 다 형용할 수가 없다. 경진년 월 二十四일에 셋째 손자를 보게 되셨는데 손자를 안고 아들을 경계하시기를 「네가 이미 세 아들을 두었는데 아비 노릇하는 도리를 아느냐? 사람들이 말하기를 아들을 낳기가 어려운 것이 아니라 잘 가르치기가 어렵다고 하니 너는 잘 도모하여 훌륭한 사람으로 기르고 아비 된 도리를 다하는 것이 어떠냐?」 하셨는데 이때 부인의 나이 五十六세이셨다. 을유년 七월 九일에는 넷째 손자를 보았는데 역시 사랑하셨다. 이해 봄에 며느리에게 말씀하시기를 「인생살이에 부귀와 성패는 모두 그 사람이 선(善)하느냐 악(惡)하느냐에 달려 있다. 내가 보건대 선을 쌓은 집에는 복(福)은 비록 오지 않더라도 화(禍)는 저절로 사라지더라. 그래서 十년이 되지 않아 집안 형편이 펴지고 자손이 잘되니 이는 음덕(陰德)이 있다는 분명한 증거이다. 악한 집은 화는 비록 빨리 닥치지 않더라도 그 달에 집이 무너져 자손이 많이 죽었으니 이는 몰래 내린 벌이 이처럼 참혹한 것이 아니겠느냐? 내가 평생 본 것만 해도 여러 사람이 그랬으니 어찌 두렵지 않느냐. 너희들은 하찮은 악이라도 하지 말고 작은 선이라도 열심히 하여 이런 지경에 이르거라.」 하셨는데 이때는 부인의 나이 六十一세이셨다. 부인의 종손(從孫) 완주(完柱)가 겨우 五, 六세 때 부모를 잃었는데 비록 백부 중부 숙부가 있었으나 모두 살림이 어려워 돌보아 주지 못하고 있었다. 그래서 부인이 데려다 가 길렀는데 사랑함이 친손자와 다름이 없었다. 二十세가 되자 장가를 보내 재산을 나누어 살림을 내 주니 사람들이 모두 칭찬하기를 「여러 백부 숙부가 있는데도 종조모가 성취시켜 주고 또 살림까지 떼어 주니 세상에 드문 일이다.」라고 하였다. 병술년 가을에 장손자를 장가보내게 되었는데 또 부잣집과 혼인하라고 권하는 자가 있었다. 부인은 전번과 마찬가지로 아들에게 말하기를 「며느리는 집안의 성쇠(盛衰)를 좌우하는 중요한 사람이니 잘 살펴야 한다. 며느리 될 사람의 성품과 행실은 물론 가법(家法)이 어떠한가 보면 되지 부귀한 집안을 부러워해서는 안 된다.사람이 참으로 현명하다면 부귀는 저절로 그 안에 있는 것이다. 내가 너희 서너 남매를 혼인시키면서 일찍이 재물을 보고 한 적이 없었고 각기 덕을 보고 가렸었다.」 하였다. 그다음 해에 부인의 족손(族孫) 한 사람이 상을 당했는데도 방탕하고 마음대로 술과 고기를 먹고 다녔다. 부인이 엄한 말로 꾸짖기를 「사람의 아들로서 부모상을 당했으면 애통한 나머지 죽고만 싶을 것이다. 그렇게 하지는 못할망정 마음껏 술과 고기를 먹어서야 되겠는가?」 하니 그 사람이 문득 깨닫고는 다시는 그렇게 하지 않았다. 무자년에는 큰 흉년이 들었다. 十월 전에 알지 못하는 두 사람이 대문 밖에 와서 서성거렸다. 부인이 종을 시켜 누구냐고 물으니 굶주림을 견디다 못해 찾아왔다는 것이었다. 두 사람이 애걸하기를 「은혜를 베풀어 벼 몇 섬만 꾸어 주시어 죽어 가는 목숨을 살려 주십시오. 그렇게 해 주시면 명년 가을에는 꼭 갚겠습니다.」 하는데 그 말이 매우 간절하였다. 부인은 하인을 시켜 그들 말대로 벼를 내주게 하고는 말하기를 「급한 사람을 구제하기 위해 주는 물건을 어찌 갚기를 바라겠소. 이걸로 한때의 굶주림이나 면하시오.」 하니, 두 사람이 사례하기를 「이처럼 후하게 선심(善心)을 베푸시는데 저희가 만약 갚지 않는다면 배은망덕(背恩忘德)한 놈이 됩니다. 어찌 도리를 모르는 사람이 되겠습니까?」 하고는 천 번 치하하고 돌아갔다. 그런데 그 후 四년 되던 해 가을에 어떤 사람 둘이 문 밖에 와서 찾는 것이었다. 부인이 하인을 시켜 누구냐고 물으니 두 사람이 말하기를 「몇 년 전 은혜를 받은 사람들입니다.」 하고는 가지고 온 술과 안주를 올리며 사례하기를 「부인님의 덕택으로 굶어죽은 귀신이 되는 것을 면하였습니다.」 하고는 꾸어간 벼에다가 이자까지 셈하여 갚는데 부인은 이자는 물리치고 본자만 받았다. 경인년 五월 六일에 또 손녀를 보고 임진년 五월 四일에는 다섯째 손자를 보니 손자 손녀가 모두 六, 七인이 되었으나 모두 자애로운 정을 쏟아 기르면서 말씀하시기를 「내가 너희들을 이처럼 사랑하는 것은 너희 선대 할아버지와 조부를 생각해서 그런 것이다.」라고 하셨는데 이때 부인의 나이 六十九세이셨다. 부인의 덕은 하인들에게까지 미쳐 그들의 환심을 사고 은혜로 돌보아 주셨다. 그래서 이해 겨울에 한 여종의 나이가 혼기(婚期)가 되어 시집을 가게 되었다. 부인은 종문서를 불사르고 내보내면서 말씀하시기를 「시집가서 아내의 도리를 잘해야 한다.」 하시니 그 여종이 방성통곡을 하면서 말하기를 「소녀가 상전님을 모시지 않고 어디로 가서 살 수 있겠습니까? 살아도 댁에서 살고 죽어도 댁에서 죽겠습니다.」 하고는 가지 않겠다고 맹세하였다. 부인은 여러 차례 이치를 들어 깨우쳐 보냈다. 그러자 이웃의 상놈들까지도 모두 부인의 지극한 덕에 감복하여 말하기를 「이 씨 부인의 덕이 이처럼 크니 반드시 오래 살면서 복을 받을 것이다.」라고 하였다. 평소 사람에 따라 안색을 달리하지 않고 반드시 그 정상을 살피셨다. 남을 대하여 다른 부인의 단점을 말하지 않으셨고 혹 말이 많은 부인을 보면 경계하시기를 「말이 많으면 자기의 덕만 손상된다.」 하셨다. 어머니는 몇 아들과 밤낮으로 부지런히 일을 하였는데 이런 감응으로 하늘에서 복을 내려 만년에는 집안 살림이 아주 부유하게 되었고 뜰에 가득한 여러 손자들 역시 모두 문사(文士)라는 이름을 얻고 있었다. 그래서 사림(士林)에서 할아버지의 효행(孝行)과 부인의 탁월한 효열(孝烈)을 감사(監司)에게 보고하고, 감사가 다시 임금께 보고하니, 임금이 그 사적을 예조(禮曹)에 내려 관직을 추증하라고 명하셨다. 그리고 임진년에는 두 분에게 모두 정려(旌閭)를 내렸으니 이는 하늘이 그분의 덕에 보답한 것이 아니겠는가? 아, 그러나 슬프게도 이듬해 계사년 六월 五일에 향년 七十세로 돌아가시니 혼자되신 지 四十년이었다. 내외손(内外孫)으로 복(服)을 입은 자가 二十여 명이었고 향리의 종족들이 모두 슬퍼하면서 탄식하기를 「부인의 아름다운 덕과 행실은 옛날 사녀(士女)의 풍도가 있었으며 실로 여자 가운데 남자이셨다. 백세의 수를 누릴 것으로 기대하였는데 어찌 七순(旬)에 그쳤는가?」 하였다. 그해 八월 十二일에 순창군 무림면 방화동(芳花洞) 마을 위 옥녀봉(玉女峯) 성지동(聖智洞) 인좌(寅坐)에 장사지냈다. 일찍이 손자들에게 훈계하시기를 「사람이 사람답게 되는 것은 배우는 데 달려 있다. 아버지가 권하고 스승이 가르치면 나이가 젊을 때 열심히 배워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무식한 향리(鄉吏) 같은 자들의 눈으로는 모두 눈과 귀가 달렸으니 누군들 사람으로 보이지 않겠는가만 성현(聖賢)의 말씀으로 생각해 보면 이는 참으로 소나 말에게 옷을 입혀 놓은 것과 같아서 모양은 사람이지만 그 속은 금수(禽獸)와 다를 게 무엇이겠느냐? 너희들은 힘쓰고 힘써서 너희 할머니의 말을 저버리지 말거라. 내가 비록 잘나지 못한 여자이지만 전에 며느리와 나눈 이야기에, 사람의 귀천과 영욕(榮辱)은 모두 배우느냐 배우지 않느냐에 달려 있다고 하였었다. 그래서 그 말로써 너희를 경계하는 것이다. 입신양명(立身揚名) 하라는 것이 나의 말이 아니라 실은 너희 선조님들의 가르침이니 범연하게 듣지 말라. 먼저 너희 부모에게 효도하고 다음에는 너희 형제끼리 화목해야 한다. 동생이 만약 형에게 공손하지 않더라도 형은 그 공손하지 않음을 본받지 말고 형으로서 우애를 다하고, 형이 혹 동생에게 우애를 하지 않더라도 동생은 형이 우애하지 않은 것을 본받지 말고 동생으로서 더욱 공손하게 하면 한 집안이 돈목하게 되고 종족이 화목하게 된다. 소원(疎遠)한 자를 더욱 친근하게 하고 친근한 자는 더 가깝게 한다면 착하게 되지 않은 사람이 없다. 너희들은 내 말이 미덥지 않느냐? 내 말을 잘 들을 자는 그 누구며 귀를 막고 듣지 않을 자는 그 누구냐? 선대의 덕망을 실추시키지 말아 후회하는 일이 없어야 한다.」라고 하셨다. 평소 부인께서 하신 말씀이나 행동은 모두 이런 유였으니 누가 부인의 말이라 하여 소홀히 여기겠는가? 만약 부인이 남자로 태어나셔서 학문을 배우셨더라면 성취된 바가 뛰어나서 군자(君子)에게 누(累)를 끼치지 않았을 것이며 어느 경지에 도달했을지 모를 정도이다. 불초 손자 완엽이 어려서부터 들은 할머니의 모습과 말씀을 잊지 못하여 마치 어제의 일처럼 새롭다. 감모(感募)하는 마음이 교차되고 아름다운 덕행이 묻혀 버릴까 염려되어 후손들에게 전하고자 삼가 평일의 중요한 말씀과 향리에 전하는 사적을 뽑아 종이에 쓰려고 하니, 구절마다 피를 삼키고 한 글자마다 눈물이 적신다. 이에 삼가 생졸 연대와 행적을 대개 적어 후세의 일을 아는 군자가 다시 잘 써주기를 기다린다. 무술년(戊戌年) 동짓달 불초(不肖) 손자 완엽(完燁)은 삼가 지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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